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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케 아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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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이케 아쓰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약하며 홈런왕 3회, 타점왕 3회를 달성했다. 도쿄 육대학 야구 리그에서 외야수로 활약하며 수위 타자를 차지하기도 했다. 1969년과 1971년에는 MVP를 수상했으며, 1971년에는 32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75년에는 지명 타자 부문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1979년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에는 코치와 해설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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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케 아쓰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나가이케 도쿠지 (長池 徳士)
본명나가이케 도쿠지 (長池 徳二)
출생일1944년 2월 21일
출생지일본 도쿠시마현 나루토시
사망일알 수 없음
신장175cm
체중82kg
투구우투
타석우타
수비 위치외야수, 지명타자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65년
드래프트 순위1순위
소속 구단한큐 브레이브스 (1966년 ~ 1979년)
첫 출장1966년 4월 9일
마지막 출장1979년 10월 14일
통산 타율0.285
홈런338개
타점969점
코치 경력
코치 팀한큐 브레이브스 (1979년 ~ 1982년)
세이부 라이온스 (1985년)
난카이 호크스 (1987년 ~ 1988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3년 ~ 1995년)
지바 롯데 마린스 (1997년 ~ 1998년)
수상
수상 내역일본 시리즈 우승 (1975년, 1976년, 1977년)
퍼시픽 리그 MVP (1969년, 1971년)
베스트 나인 (1967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5년)
기타 정보
고등학교도쿠시마현립 무야마 고등학교
대학교호세이 대학
별명미스터 브레이브스

2. 프로 입단 전

대학 졸업 후 난카이 호크스 입단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 해부터 프로 야구는 드래프트 제도를 도입했다. 한큐 브레이브스가 1965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했고(난카이는 2순위 지명 예정), 난카이와 3000만이 약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만으로 계약금이 억제되었다. 나가이케는 희망 구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약금도 줄어든 것에 대해 "정말, 대단한 것(드래프트 제도)이 생겨났네"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회상했다.[11] 그러나 결과적으로 "(난카이에 입단했다면) 인생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한큐에서 아오타 노보루 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제대로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아마 안 되었을 것 같다"라고 훗날 회상했다.[12]

2. 1. 유년 시절

나가이케 아쓰시가 태어났을 당시 집안은 미싱 판매 대리점을 했다.[7] 본명인 도쿠지(徳二)는 그가 둘째 아들이어서 "'''도쿠'''시마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라고 한다.[7]

중학생 시절까지 포지션은 주로 내야수였지만[8], 고등학교 입학 후 투수로 전향했다.[9] 무야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60년, 에이스로서 추계 시코쿠 대회 결승에 진출하여, 다카하시 요시마사가 있던 고치 상업을 꺾고 우승했다. 이듬해인 1961년 봄의 선발 대회에 출전했지만, 2회전(첫 경기)에서 마쓰에 상업에 패했다.[10] 그해 여름에는 현 예선 준준결승에서 조난 고등학교에 패하여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다. 같은 해 난카이 호크스의 테스트를 받았지만,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으로부터 "쓸모 있게 되려면 4년은 걸리겠네. 놀러 간 셈 치고 대학에 가라"는 말을 듣고,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62년 쓰루오카의 모교인 호세이 대학 경영학부에 진학했다.[11]

호세이대에서는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살리기 위해 외야수로 전향하여,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재학 중 3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3학년이던 1964년 추계 리그에서는 수위 타자를 획득했으며, 같은 해 10월 도쿄 올림픽 데몬스트레이션 게임으로 개최된 미일 대학 야구 선발 경기에 6번 타자, 우익수로 출전했다. 4학년이던 1965년 춘계 리그에서는 에이스 사토미 타다시를 앞세워 우승에 기여했다. 직후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추쿄대에 패했다. 리그 통산 60경기 출장, 217타수 62안타, 타율 .286, 3홈런, 30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3회 선정되었다. 호세이대 시절에는 통산 3홈런을 기록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거리포는 아니었다. 동기로는 외야수 가마다 유타카가 있다.

2. 2. 학창 시절

나가이케 아쓰시는 도쿠시마현립 무야 고등학교(현재의 도쿠시마 현립 나루토 제1 고등학교) 시절인 1961년에 투수로서 춘계 선발 대회(제33회 선발 고등학교 야구 대회)에 출전했다. 2차전에서 마쓰에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하여 탈락했다.[10] 3학년 때 난카이 호크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으로부터 “쓸만해지려면 4년은 걸린다. 놀러가는 셈치고 대학에 다녀와라”라는 말을 듣고 쓰루오카의 모교인 호세이 대학 경영학부에 진학했다.[34]

호세이 대학에서는 외야수로 전향했고, 도쿄 6대학 리그 통산 60경기에 출전하여 217타수 62안타, 타율 2할 8푼 6리, 3홈런, 30타점을 기록했다. 베스트 나인을 세 차례나 선정되었고, 3학년 추계 리그에서는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호세이 대학 시절에는 수위 타자를 차지한 경험은 있으나 통산 3홈런의 성적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장거리형 선수는 아니었다.[34]

대학을 졸업하면 난카이 입단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그 해부터 프로 야구는 드래프트 제도를 도입해 한큐 브레이브스가 1965년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했다. 드래프트 제도의 목적에는 오르기만하는 계약금 억제도 있지만 난카이와 3000만이 약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만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희망 구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약금도 삭감되어서 “진짜 대단한 것(드래프트 제도)이 생겨버렸다”라고 나가이케는 쓴웃음을 지으며 되돌아보고 있다.[34]

2. 3. 드래프트 지명

도쿠시마 현립 무야 고등학교(현재의 도쿠시마 현립 나루토 제1 고등학교) 시절인 1961년에 투수로서 춘계 선발 대회에 출전했고 2차전 상대인 마쓰에 상업고등학교에게 패하여 탈락했다. 3학년 때 난카이 호크스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에게서 “쓸만해지려면 4년은 걸린다. 놀러가는 셈치고 대학에 다녀와라”라는 말을 듣고 쓰루오카의 모교인 호세이 대학 경영학부에 진학했다.[34] 대학 졸업 후 난카이 입단이 약속돼 있었지만, 그 해부터 프로야구는 드래프트 제도를 도입하면서 한큐 브레이브스가 1965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했다. 드래프트 제도의 목적에는 계약금 억제도 있었는데, 난카이와 3000만이 약속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만으로 하향 조정되었다. 희망 구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약금도 삭감되어서 “진짜 대단한 것(드래프트 제도)이 생겨버렸다”라고 나가이케는 쓴웃음을 지으며 회고했다.[34]

3. 프로 선수 시절

나가이케 아쓰시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요청으로 아오타 노보루 코치의 지도를 받아, 철저한 몸쪽 공략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오른쪽 손바닥이 퉁퉁 부을 정도였지만,[34][35] 아오타 코치의 조언을 바탕으로 연습을 반복하며 '''왼쪽 어깨에 턱을 올리고 팔을 크게 뒤로 빼는 독특한 타격 폼'''을 만들었다. 이 폼은 나가이케의 대명사가 되었다.

1969년에는 타율 0.316, 41홈런, 101타점으로 홈런왕타점왕 2관왕을 차지하며 노무라 가쓰야의 9년 연속 홈런왕을 저지했다. 리그 3연패의 원동력이 된 나가이케는 MVP에도 선정되었다. 1971년에는 타율 0.317, 40홈런으로 통산 두 번째 MVP를 수상했고, 그해 당시 일본 신기록인 3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신기록이 걸린 32경기째에도 3타석 연속 홈런이라는 호쾌한 형태로 기록을 달성했다.[36] 이 기록은 197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다카하시 요시히코에 의해 경신되었으나 퍼시픽 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2년에는 올스타전까지 오스기 가쓰오에게 홈런 부문에서 15개 차로 뒤져 있었으나, 후반기부터 맹추격하여 9월에는 당시 프로 야구 월간 홈런 신기록(15개)을 세우며 오스기를 따라잡았다. 결국 나가이케는 41홈런, 오스기는 40홈런으로 역전 홈런왕에 올랐다. 1973년에도 43홈런, 109타점으로 2관왕을 차지했지만, 시즌 막판 타율이 떨어지는 바람에 3관왕은 놓치고 4위에 만족해야 했다.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 시절 지명 타자 제도가 도입되면서 1975년에 나가이케는 지명 타자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해 지명 타자 부문에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팀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77년경부터 무릎 통증에 시달리면서 대타로 경기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고, 1979년부터는 팀의 타격 코치를 겸임하다가 그해를 마지막으로 14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3. 1. 한큐 브레이브스

나가이케 아쓰시는 1966년부터 1979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활동한 프로 야구 선수이다.

입단 초기에는 몸이 뻣뻣하고 프로의 빠른 공에 적응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과 아오타 노보루 코치의 지도 아래 각고의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뛰어난 타자로 성장했다. 특히 왼쪽 어깨에 턱을 올리고 팔을 크게 뒤로 빼는 독특한 타격 폼은 그의 대명사가 되었다.

1969년 홈런왕과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하며 리그 MVP를 수상했고, 1971년에는 32경기 연속 안타라는 당시 일본 신기록을 세웠다. 1972년에는 올스타전까지 15개 차로 뒤지던 홈런 경쟁에서 후반기에 맹추격하여 역전 홈런왕을 차지하는 등 극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1973년에도 홈런, 타점 2관왕을 차지하며 팀의 중심 타자로 활약했다.

1975년 지명 타자 제도가 도입되면서 지명 타자로 전향했고, 그해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팀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77년부터는 무릎 부상으로 대타 출전이 잦아졌고, 1979년 타격 코치를 겸임하다 은퇴했다.

통산 14시즌 동안 1449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285, 338홈런, 969타점을 기록했다.

연도소속팀경기 수타수안타홈런타점타율
1966한큐6819852722.263
19671294661312778.281
19681324781143079.238
196912948715441101.316
197012142413128102.309
197113047615140114.317
19721113861124195.290
197312847915043109.313
19741214421282796.290
19751033781022558.270
1976110344821259.238
197758142391027.275
19785510427521.260
197954681728.250
통산144948721390338969.285


  •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 표의 첫 번째 연도에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을 수정함.

3. 1. 1. 입단 초기 (1966~1968)

나가이케 아쓰시는 입단 후 몸이 뻣뻣하여 프로에서는 무리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유연성 체조로 극복했다. 프로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특히 안쪽 공을 전혀 칠 수 없었지만, "스펜서와 같은 일본인 슬러거를 만들고 싶다"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요청에 따라 아오타 노보루 코치가 지도하여, 철저한 안쪽 공 공략 연습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잡아당길 수 없을 뿐더러 맞히지도 못하고, 맞아도 밀려나 꼼짝없이 막히는 바람에 오른쪽 손바닥이 부어올랐다.[34][35]

그 때 아오타 코치가 “공 안에 그립을 넣어 안쪽에서 치라”고 조언했고, 그것을 터득하기 위해 연습을 반복하는 도중에 '''왼쪽 어깨에 턱을 올리고 팔을 크게 뒤로 빼며 큰 자세를 취하는 독특한 폼'''을 만들어 냈다. 이 폼은 나가이케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2년째인 1967년에는 27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잘 때려내지 못했던 몸쪽도 ‘일품’이라 불릴 만큼 특기가 되었다. 지금도 나가이케는 장거리 타자로서의 자신을 ‘아오타의 작품’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아오타는 “내가 볼일이 있다고 해도 나가이케는 안 보내줬다. 혼자서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조언을 하면 떠나는데 바로 ‘봐달라’며 되돌아오게 하고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나가이케 자신이 노력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34]

3. 1. 2. 전성기 (1969~1974)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은 "다릴 스펜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인 슬러거를 만들고 싶다"며 아오타 노보루 코치에게 나가이케의 지도를 요청했고, 아오타 코치는 철저한 몸쪽 공략 연습을 시켰다. 처음에는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고 오른쪽 손바닥이 퉁퉁 부을 정도였지만,[34][35] 아오타 코치의 "공 안에 그립을 넣어 안쪽에서 치라"는 조언을 바탕으로 연습을 반복하며 '''왼쪽 어깨에 턱을 올리고 팔을 크게 뒤로 빼는 독특한 타격 폼'''을 만들었다. 이 폼은 나가이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결과, 1967년에는 27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약점으로 여겨졌던 몸쪽 공도 '일품'이라 불릴 만큼 특기로 만들었다. 나가이케는 장거리 타자로서의 자신을 '아오타의 작품'이라고 칭했지만, 아오타는 "내가 만들었다기보다는 나가이케 자신이 노력한 것이다"라며 나가이케의 노력을 강조했다.[34]

1969년에는 타율 0.316, 41홈런, 101타점으로 홈런왕타점왕 2관왕을 차지하며 노무라 가쓰야의 9년 연속 홈런왕을 저지했다. 리그 3연패의 원동력이 된 나가이케는 MVP에도 선정되었다. 1971년에는 타율 0.317, 40홈런으로 통산 두 번째 MVP를 수상했고, 그해 당시 일본 신기록인 3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했다. 신기록이 걸린 32경기째에도 3타석 연속 홈런이라는 호쾌한 형태로 기록을 달성했다.[36] 이 기록은 1979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다카하시 요시히코에 의해 경신되었으나 퍼시픽 리그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72년에는 올스타전까지 오스기 가쓰오에게 홈런 부문에서 15개 차로 뒤져 있었으나, 후반기부터 맹추격하여 9월에는 당시 프로 야구 월간 홈런 신기록(15개)을 세우며 오스기를 따라잡았다. 결국 나가이케는 41홈런, 오스기는 40홈런으로 역전 홈런왕에 올랐다. 1973년에도 43홈런, 109타점으로 2관왕을 차지했지만, 시즌 막판 타율이 떨어지는 바람에 3관왕은 놓치고 4위에 만족해야 했다. 1969년부터 1973년까지 5시즌 동안 타율 3할 이상 4회, 40홈런 이상과 100타점 이상을 각각 4회씩 기록하는 등 제1차 한큐 황금 시대에 4번 타자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3. 1. 3. 지명타자 전향과 은퇴 (1975~1979)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 시절 지명 타자 제도가 도입되면서 1975년에 나가이케는 지명 타자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 해 지명 타자 부문에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팀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했다.[13][2] 이듬해 한큐는 여섯 번째 도전 끝에 요미우리를 꺾는 데 성공했지만, 나가이케는 자신이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해 “그때는 이미 나는 끝난 상태였기에 별로 재미없었다”라고 말했다.[35][13] 그는 처음으로 지명 타자 부문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지만, 지명 타자에 대해서는 “기분상 야구를 절반 밖에 즐기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손 놓고 가만있는 건 아니지만 역시 공을 때리고 수비하는 게 야구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35][13][2]

1977년경부터 무릎 통증에 시달리면서 대타로 경기에 나서는 경우가 많아졌고, 1979년부터는 팀의 타격 코치를 겸임하다가 그 해를 마지막으로 14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7]

4. 지도자 시절

나가이케 아쓰시는 은퇴 후 여러 프로 야구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다. 한큐 브레이브스 1군 타격 코치(1980~1982), 마이니치 방송 해설자(1983~1984, 1986), 세이부 1군 타격 코치(1985), 난카이 호크스 1군 타격 코치(1987~1988), 후쿠오카 방송 해설자(1989~1992, 1996), 요코하마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1993~1995), 닛폰 TV 해설자(1996), 지바 롯데 마린스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1997~1998)를 역임했다. 2004년에는 오릭스미야코섬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타격 코치를 맡기도 했다.[23]

코치로서 높은 수완을 발휘하여 아키야마 고지, 가나모리 에이지(세이부), 사사키 마코토(난카이), 스즈키 다카노리, 이시이 다쿠로, 하루 도시오(요코하마), 고사카 마코토, 후쿠우라 가즈야(지바 롯데) 등 많은 선수들을 육성했다.

1990년과 1991년에는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요청으로 야쿠르트 사이토 캠프 임시 코치를 맡아 나시마 카즈시게, 후루타 아츠야, 아라이 유키오, 토마시노 켄지의 1군 기용에 대한 조언을 했고, 도바시 카츠유키의 잠재력을 간파하여 맨투맨 지도를 했다. 특히 후루타에게는 "30개 칠 겁니다"라고 노무라에게 진언했고, 실제로 후루타는 그 해 수위 타자, 1992년에 30홈런을 기록했다.

1999년부터 후쿠오카 방송 해설자로 복귀했고, 2009년까지는 닛폰 TV 해설자, 2012년까지는 라디오닛폰, 라디오 간사이 해설자도 겸임했다. 또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스포츠 닛폰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4. 1. 한큐 브레이브스 코치 (1980~1982)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한큐 브레이브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하지만 3년차 시즌을 마친 1982년 10월 26일, 니시노미야 구장에서의 연습 중 야가타 카츠히로 구단 상무로부터 다음 시즌에는 계약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전년에 부활한 우에다 토시지 감독도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23] 야가타는 체면을 중시했는지 "사임해 주십시오"라고 말했고, 팀은 마쓰나가 히로미, 이시미네 가즈히코 등 젊은 선수들로 세대 교체를 추진하고 있었으며, 나가이케는 가을 캠프 훈련 메뉴를 짜고 있었다. 그러나 나가이케는 스스로 사임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아니요, 해임으로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23] 장소를 오사카우메다의 구단 사무실로 옮겨 오카다 사카에 구단 사장, 우에다 감독과 만났는데, 그 해 한큐는 전후기 모두 4위로 4년 연속 우승을 놓쳤고,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는 형태였다.[23] 나가이케는 기자 회견에서 선수, 코치로서 17년간 키워준 한큐에게 사의를 표하며, 아쉬운 퇴단을 하게 되었다.[23] 이 날, 세이부 대 주니치의 일본 시리즈 3차전이 열렸고, 평론가 취재로 세이부 구장에서 "나가이케 해임" 소식을 들은 니시모토 유키오는 "왜 나가이케가 그만둬야 하는 거야"라고 구단에 전화했다고 나중에 알려졌다.

4. 2. 세이부 라이온스 코치 (1985)

1985년에는 세이부 라이온스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1984년 오프,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으로부터 타격 코치 제안을 받았다.[23] 아키야마 고지에게 "4번 타자로 해 달라"고 설득을 받았다.[23] 아키야마를 맨투맨으로 지도했고, 고치하루노에서 아침 1시간의 조기 특타, 밤에도 훈련을 시켜 상당한 훈련이었지만 아키야마는 묵묵히 해냈고, 1985년, 아키야마는 훌륭하게 재능을 꽃피워 주로 6번 타자를 맡아 40홈런을 쳤다.[23] 2년 만에 3번째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85년 1월 19일에는 히로오카와 함께, 곤도 아키히토 수비・주루 코치, 히사다 요시아키 배터리 코치와 함께 도쿄하네다JAL 훈련 센터에서 점보기의 시뮬레이션 비행에 도전했다. 곤도와 히사다는 해면에 착륙해 버렸지만, 나가이케는 2번 실시하여 2번 모두 완벽하게 착륙했는데, 사실 교관이 나가이케의 친형이었고 파일럿이었다.[25]

4. 3. 난카이 호크스 코치 (1987~1988)

스기우라 다다시일본어 감독의 부름을 받아 난카이 호크스의 1군 타격 코치로 취임했다.[26] 진검을 사용한 거합을 도입한 지도로 사사키 마코토를 단련시켰다.[26] 타선은 사사키, 유가미타니 히로시의 1, 2번 콤비가 정착했고, 1987년에는 9월 초까지 3위를 기록하며 선전했으며,[27] 2년 연속 최하위에서 4위로 올라섰다.[26] 사사키, 유가미타니, 후지모토 히로시, 키시카와 카츠야 등 젊은 선수들의 육성에 힘썼다.[27] 일본도 연습도 도입했는데, 세이부 시절 히로오카 타츠로에게 배웠고, 아키야마 고지에게도 시켰다.[27] 몬다 히로미츠가 어느 날 자신의 타석에서 좌투수가 구원 등판하자 벤치로 돌아왔다.[27] "어떻게 된 거야?"라고 묻자 "교체죠"라고 답했는데, 그런 기용이 통했다.[27] 나가이케는 "무슨 소리.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가서 쳐."라고 말했고, 몬다는 역전을 부르는 2루타를 쳤다.[27] 우타자인 다카야나기 히데키도 기용할 수 있는 좌투수도 선발로 기용했다.[27] 다카야나기는 부동의 4번 타자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홈런왕을 차지, "불혹의 대포"라고 불렸다.[27] 세이부 퇴단 후에 타석에 섰을 때의 긴장감을 원했던 나가이케는, 히로오카로부터 거합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떠올리고, 니시노미야시에서 중심류의 사범을 하고 있는 청과물 가게의 사장에게 1개월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26] 1988년 4월 23일에 "내 눈이 살아있는 동안은 호크스를 팔지 않겠다"라고 말했던 가와카츠 덴 오너가 사망했다.[27] 구단 매각 이야기가 불거지고, 새로운 오너가 된 요시무라 시게오는 7월 말 올스타 브레이크에 수뇌진을 모아 "몸을 팔지 않겠다"라고 팀의 동요를 가라앉히려고 말했다.[27] 9월 10일, 원정지인 도쿄의 호텔에서 스기우라로부터 "올해를 마지막으로 물러나겠다. 다음 감독을 해줬으면 한다."라는 감독 취임 요청을 받았다.[27] 나가이케는 놀랐고, 차기 감독은 치프 코치인 후지와라 미쓰루로 예상되었다.[27] "순위도 올라갔다. 스기우라 씨가 계속하는 게 좋지 않습니까"라고 말했지만, "아니, 나는 이제 안 돼"라며 퇴임 의사를 굳힌 듯했다.[27] 9월 13일, 요시무라 오너는 대형 슈퍼・다이에와 구단 매매 교섭을 하고 있다고 인정했다.[27] 구단 양도의 조건으로 "호크스의 명칭을 남긴다", "스기우라 감독의 유임"을 내걸었다.[27] 이후 스기우라로부터 "그 이야기는 없어졌다"라는 이야기가 있었고, "내가 규슈에 가서, 감독을 계속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새로운 코치진을 편성하기 위해 물러나주었다고 들었고, 나가이케는 "반론할 수도 없었다. 3일 동안만 감독의 기분을 맛본 것이었다."[27]라고 회고했다.

4. 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코치 (1993~1995)

곤도 아키히토 감독의 지휘 아래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를 맡았다. 요코하마는 신구 교체기에 있었으며, 스즈키 다카노리나 신인 사에키 다카히로 등 젊은 선수들을 단련시켰다.[28] 1994년 8월 9일 요미우리전(도쿄 돔)에서 3-1로 앞선 4회 1사 만루 상황에 투수 타순이 돌아오자, 나가이케는 곤도에게 대타로 스즈키를 기용할 것을 요청했고, 스즈키는 마키하라 히로미에게서 프로 첫 홈런이자 만루 홈런을 쳐냈다.[29] 스즈키는 이후 수위 타자를 두 번 차지했으며, 나가이케는 우타자라도 좌타자를 지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28] 1995년, 요코하마는 처음으로 흑자를 냈지만 4위에 그쳤다. 그해 10월,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곤도는 계약 만료로 팀을 떠나게 되었음을 알렸고,[28] 나가이케 역시 다음 날 구단 사무실을 찾아 사임을 표명했다.[28] 오호리 다카시 구단 사장은 "그렇게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말했다.[28]

4. 5.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1997~1998)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다시 곤도 아키히토 감독의 지휘 하에 지바 롯데 마린스의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를 맡았다.[23] 2년 연속 최하위로 1998년에는 프로 야구 최악 기록인 18연패를 기록하기도 했다.[28] 곤도 감독이 책임을 지고 사임한 1998년 10월 8일, 공교롭게도 3년 전까지 함께 땀을 흘렸던 요코하마가 38년 만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28] 나가이케 아쓰시는 롯데 코치 시절 고사카 마코토, 후쿠우라 가즈야를 길러냈다.[23] 프로 현장에서 유니폼을 입은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28]

4. 6. 임시 코치 및 해설가 활동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한큐 1군 타격 코치를 맡았으나, 1982년 시즌 후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이후 마이니치 방송 해설자(1983년~1984년, 1986년), 세이부 1군 타격 코치(1985년), 난카이 1군 타격 코치(1987년~1988년), 후쿠오카 방송 해설자(1989년~1992년, 1996년), 요코하마 1군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1993년~1995년), 롯데 1군 수석 코치 겸 타격 코치(1997년~1998년)를 역임했다. 코치로서 아키야마 고지, 가나모리 에이지(세이부), 사사키 마코토(난카이), 스즈키 다카노리, 이시이 다쿠로, 하루 도시오(요코하마), 고사카 마코토, 후쿠우라 가즈야(지바 롯데) 등을 지도했다.

1985년 세이부 코치 시절에는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의 요청으로 아키야마 고지를 집중 지도하여 40홈런 타자로 성장시켰다.[23] 난카이 코치 시절에는 진검을 사용한 거합 훈련을 도입하여 사사키 마코토를 단련시켰다.[26] 1990년과 1991년에는 노무라 카츠야 감독의 요청으로 야쿠르트 임시 코치를 맡아 후루타 아츠야 등에게 조언을 했다.

1998년 롯데 코치 시절 팀의 18연패를 경험했고, 곤도 아키히토 감독과 함께 퇴임했다. 1999년부터 후쿠오카 방송 해설자로 복귀했으며, 2004년에는 오릭스 미야코섬 스프링 캠프에서 임시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09년까지는 닛폰 TV 해설자, 2012년까지는 라디오닛폰, 라디오 간사이 해설자를 겸임했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스포츠 닛폰 야구 평론가로도 활동했다.

5. 주요 기록

연도소속경기타석타수득점안타2루타3루타홈런루타타점도루도루자희생 번트희생 플라이볼넷고의 4구사구삼진병살타율출루율장타율OPS
1966년한큐68206198185264787221220501293.263.284.439.724
1967년1295234666613115027227781290744265412.281.351.487.838
1968년132547478731141713022379123175734727.238.325.467.791
1969년12955148795154222413031012180754434914.316.388 .6221.010
1970년1214864245913120128237102187095033469.309.386.559.945
1971년1305584768715119240294114891769953719.317.409.6181.027
1972년111452386721121114124895640756433617.290.384 .6421.027
1973년12855947989150162432991095505731224613.313.406 .6241.030
1974년121485442601281812722996970438113814.290.347.518.865
1975년103423378551021202518958631538212913.270.338.500.838
1976년11037634425821001212859042425114112.238.292.372.664
1977년5816414221392010712700041800193.275.356.500.856
1978년551201041027105432100021400133.260.347.413.761
1979년547368317002238000050071.250.301.338.640
통산 : 14년144952234872733139016914338260196998617685464130516140.285.361.534.895


  • '''굵은 글씨'''는 시즌 최고 성적.

  • 최우수 선수: 2회 (1969년, 1971년)
  • 베스트 나인: 7회 (외야수 부문: 1967년, 1969년 - 1973년, 지명 타자 부문: 1975년) ※ 1975년은 지명 타자 부문에서 퍼시픽 리그 사상 최초 수상
  • 올스타전 MVP: 3회 (1967년 2차전, 1970년 1차전, 1971년 2차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2회 (1968년, 1969년) ※ 2년 연속은 그 외에 기요하라 가즈히로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MVP: 1회 (1975년)
  •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감투상: 1회 (1974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 1회 (1971년[31])


; 첫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66년 4월 9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차전 (고라쿠엔 구장), 7번·우익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1966년 7월 23일, 대 난카이 호크스 13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7회말에 나카타 마사히로의 대타로 출장, 와타나베 타이수케로부터
  • 첫 홈런·첫 타점: 1966년 7월 24일, 대 난카이 호크스 14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5회말에 다카하시 에이이치로로부터 2점 홈런


; 이정표 기록

  • 100홈런: 1969년 9월 27일, 대 롯데 오리온스 27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2회말에 가와바타 가즈토로부터 좌월 솔로
  • 150홈런: 1971년 6월 9일, 대 긴테쓰 버팔로스 8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7회말에 반도 사토시로부터 좌월 2점 홈런
  • 200홈런: 1972년 9월 3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21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5회말에 다나카 아키라로부터 좌월 솔로 ※역대 19번째
  • 1000안타: 1974년 4월 10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전기 2차전 (후지사키다이 현영 야구장), 5회초에 미우라 마사키로부터 중전 안타 ※역대 85번째
  • 1000경기 출장: 1974년 6월 8일, 대 난카이 호크스 전기 9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4번·우익수로 선발 출장 ※역대 172번째
  • 250홈런: 1973년 9월 14일, 대 태평양 클럽 라이온스 후기 10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1회초에 야나기다 유타카로부터 중월 솔로 ※역대 11번째
  • 300홈런: 1975년 6월 22일, 대 태평양 클럽 라이온스 전기 13차전 (헤이와다이 구장), 7회초에 다나카 아키라로부터 솔로 ※역대 8번째


; 기타 기록

  • 월간 홈런: 15개, 1972년 9월
  • 연속 경기 안타: 32경기, 1971년 5월 28일 대 난카이 호크스전 - 7월 6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전
  • 연속 경기 출루: 53경기, 1972년 7월 29일 대 롯데 오리온스전 - 10월 1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전
  • 연속 경기 타점: 11경기, 1974년 6월 8일 대 난카이 호크스전 - 6월 25일 난카이 호크스전 ※퍼시픽 리그 타이기록
  • 연속 타석 홈런: 4개, 1967년 6월 4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전 - 6월 6일 대 난카이 호크스전 ※역대 3번째, 역대 2위 타이기록
  • 연속 타수 홈런: 4개, 상동 ※역대 3번째, 역대 2위 타이기록
  • 올스타전 출장: 9회 (1967년 - 1975년)

6. 평가 및 영향

나가이케 아쓰시는 3번의 홈런왕과 3번의 타점왕을 차지했으며, 1967년부터 1975년까지 9년간 4번 타자로 활약하며 매 시즌 25홈런 이상을 기록했고, 그 중 4번은 40홈런 이상을 기록했다. 안타 대비 홈런 비율이 매우 높아 통산 IsoP는 0.249였다. 또한, 타율 0.300 이상을 4번 달성했으며, 그 중 3번은 40홈런을 동시에 달성했다.

당시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뛰었던 야마구치 다카시는 자가용이 없어서 니시쿄고쿠 구장 경기 등에서 나가이케의 차를 얻어 타곤 했다. 1975년경 나가이케는 자가용 캐딜락을 타고 구장에 들어갈 때, 여름에도 카 에어컨을 켜지 않고 창문도 열지 않은 채 레인코트를 입고 땀을 흘렸다고 한다.[31]

'''수상 경력'''

상 종류수상 횟수수상 연도
최우수 선수2회1969년, 1971년
베스트 나인7회외야수 부문: 1967년, 1969년 - 1973년
지명 타자 부문: 1975년 (퍼시픽 리그 사상 최초)
올스타전 MVP3회1967년 2차전, 1970년 1차전, 1971년 2차전
일본 시리즈 감투상2회1968년, 1969년 (2년 연속 수상은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동일)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MVP1회1975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감투상1회1974년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수훈상1회1971년[31]


참조

[1] 웹사이트 Japanese Best Nine Winners, http://baseballguru.[...] The Baseball Guru 2020-07-26
[2] 웹사이트 阪急不動の4番は長池徳二!現役時代の成績は? https://bbcrix.com/a[...] Baseball Crix 2018-05-01
[3] 문서 長池が付けていた背番号3は永久欠番になる予定だったが、1985年から他球団で打撃コーチになった為に取り消し。なお、阪急最後の年に背番号3を付けたのは[[石嶺和彦]]である。
[4] 웹사이트 運も実力のうち!? NPB通算メモリアル弾達成者10人で本塁打王は1人だけ https://full-count.j[...] Full-Count 2018-05-01
[5] 문서 阪急が身売りした後に誕生した[[オリックス・バファローズ|オリックス]]時代を含めての球団記録である。
[6] 웹사이트 【世代別ベストナイン】「1943年」攻撃力に勝る“四番打者世代”/松原誠、土井正博、長池徳二、マニエル http://column.sp.bas[...]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2018-05-01
[7] 뉴스 「我が道」長池徳士 (1) 스포츠니ッポン 2023-07-01
[8] 뉴스 「我が道」長池徳士 (2) 스포츠니ッポン 2023-07-02
[9] 뉴스 「我が道」長池徳士 (3) 스포츠니ッポン 2023-07-03
[10] 서적 選抜高等学校野球大会60年史 毎日新聞社 1989
[11] 서적 豪打列伝 文春文庫
[12] 웹사이트 なぜ大型トレードが消えたのか 元阪急4番が水面下で進んでいたエースらとの交換の新事実を明かす https://www.daily.co[...] 데일리스포츠 2024-02-23
[13] 문서 『阪急ブレーブス黄金の歴史 よみがえる勇者の記憶』([[베이스볼・매거진사]])における[[加藤秀司|加藤英司]]との対談より
[14] 서적 プロ野球三国志
[15] 웹사이트 【7月6日】1971年(昭46) 長池徳士、妻の前での日本記録は豪快な本塁打 https://web.archive.[...] 스포니치
[16] 문서 因みに前記録保持者の[[野口二郎]]はこの時阪急の1軍投手コーチを務めていた為、長池の記録更新に立ち会っている。
[17] 서적 プロ野球三国志
[18] 웹사이트 【野球】子年のプロ野球 巨人&オリックスに縁起よし? https://www.daily.co[...] 데일리스포츠 online 2020-01-05
[19] 웹사이트 【10月15日】1972年(昭47) 残り1試合 長池徳士 奇跡の逆転本塁打王 https://web.archive.[...] 스포니치
[20] 문서 それだけに1978年の日本シリーズ第7戦で起きた大杉の「ファールのホームラン事件」(空白の79分)は複雑な気持ちであったという。チームのセンターライン強化により自身がDHに回されたことも触れている。([[福本豊]]の著書『追憶の球団 阪急ブレーブス 光を超えた影法師』より)
[21] 문서 なお、この時の首位打者はチームメートの[[加藤秀司]]だった
[22] 문서 このトレードは、柳田豊が絡む件としては交渉先を[[大阪近鉄バファローズ|近鉄]]に変えて、近鉄から[[土井正博]]、太平洋から柳田と[[芝池博明]]との2対1として成立している。
[23] 뉴스 長池徳士の我が道㉖、広岡監督から「秋山を4番に」 스포츠니ッポン 2023-07-27
[24] 웹사이트 阪急と訣別後、指導者として成功した男を支えたものは「見返してやる」の反骨心~長池徳士氏が語る/野球/デイリースポーツ online https://www.daily.co[...]
[25] 뉴스 操縦完ぺき 広岡さんV界良好 스포츠니ッポン 1985-01-20
[26] 서적 プロ野球レジェンドが語るあの日、あのとき 産経新聞出版 2015
[27] 뉴스 長池徳士の我が道㉗、身売りで消えた「南海監督」 스포츠니ッポン 2023-07-28
[28] 뉴스 長池徳士の我が道㉘、汗を流した横浜、ロッテ時代 스포츠니ッポン 2023-07-29
[29] 서적 プロ野球レジェンドが語るあの日、あのとき
[30] 서적 伝説の剛速球投手 君は山口高志を見たか 講談社 2014-10-23
[31] 웹사이트 歴代授賞者 http://www.jpsa.jp/a[...] 公益財団法人[[日本プロスポーツ協会]] 2017-11-25
[32] 웹사이트 ヤクルト山田哲が記録した12試合連続打点の価値 阪神バースはどうだった? https://full-count.j[...] 2018-08-07
[33] 뉴스 【データ】村上宗隆プロ野球新5打席連続本塁打 20人「打数」と13人「打席」の両方を更新 https://www.nikkansp[...] 2022-08-02
[34] 문서 Sports Graphic Number 편 ‘호타열전’(분슌분코 비주얼판)
[35] 문서 《한큐 브레이브스 황금의 역사 - 새로 태어나는 용자의 기억》([[베이스볼 매거진사]])에 있어서의 [[가토 히데지]]와의 대담에서 나온 내용이다.
[36] 뉴스 【7月6日】1971年(昭46) 長池徳士、妻の前での日本記録は豪快な本塁打 http://www.sponichi.[...] 스포니치 2009-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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